저는 독립영화 연출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예술인들이 그렇듯 예술인들에게는 공통적인 고민이 창의성의 문제입니다. 예술인들에게 창작은 숙명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매번 새로운 작품을 할 때마다 새로운 것을 꺼내야 하는데, 새로운 것을 꺼내는 제일 확실한 방법이 나를 찾는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합니다. 불가에서는 무아론을 기점으로 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독특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절대적인 자아가 없다는 말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는지, 그렇다면 예술 작업 자체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질문자가 직장에 가면 직장에서 역할에 따라 감독이면 감독이라고 불리겠죠. 가게에 가면 손님이라고 불리죠. 만약에 교회나 절에 가면 신자라고 불리겠죠. 아이가 학교에 다니는데 질문자가 학교에 가면 학부형이라고 불리겠죠. 그렇다면 자기라는 존재는 무엇일까요? 질문자는 아빠입니까, 남편입니까, 손님입니까, 학부형입니까?
그럴 때 질문자는 그 무엇도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 무엇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 무엇이든 될 수가 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라고 표현합니다. 불수자성(不守自性)은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아니한다는 뜻입니다. 즉 ‘이것이다’ 하고 정해진 것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수연성(隨緣成)은 다만 인연을 따라 이루어질 뿐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인연 맺으면 아빠, 이렇게 인연 맺으면 남편, 이렇게 인연 맺으면 학부형, 이렇게 인연 맺으면 손님이 될 뿐입니다. 여기 가면 감독, 저기 가면 신자, 이렇게 인연을 따라 이루어집니다. 내가 청소를 하면 청소부, 농사를 지으면 농사꾼, 감독을 하면 감독, 배우를 하면 배우가 되는 거예요. 나는 본래부터 배우가 아니에요. 이런 인연에서 배우라고 불리는 거죠. 나는 학부형이라고 정해진 것이 아니라 아이가 학교에 다니면 내가 학교에 갔을 때만 학부형이라고 불리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나는 배우다’ 하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생각이에요. 그 역할을 할 때에만 배우입니다. ‘스님이 농사를 짓는다’ 이 말도 정확하게는 맞지가 않습니다. 스님이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습니다. 주로 스님이라는 역할을 많이 하면 ‘저 사람은 스님이다’ 하고 마치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본인도 ‘내가 스님이다’ 하고 생각하게 되고요.
그런데 제가 아버지를 만나면 아버지한테는 제가 아들입니까, 스님입니까? 아들입니다. 이것을 헷갈려하면 충돌이 일어나는 거예요. 내가 스님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는 아버지라 하더라도 신자니까 누가 누구한테 절을 해야 돼요? 신자가 스님에게 절을 해야 합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신자가 스님한테 절을 하잖아요. 그런데 내가 아들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는 누가 누구한테 절을 해야 돼요? 내가 아버지한테 절을 해야 합니다. 제가 집에 가면 그 환경에서 아들 역할을 해야지 스님 역할을 하면 안 돼요. 아버지가 절에 오면 신자 역할을 해야지 아버지 역할을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것처럼 아무리 질문자가 감독이라 하더라도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갔을 때는 그냥 학부형입니다. 거기서 감독 역할을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이것을 분간하지 못해서 충돌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그 무엇도 아닙니다. 즉 ‘무아’입니다. 그 무엇도 아니기에 인연을 따라서 무엇이든지 될 수가 있습니다. 이 도리를 알면 여러분들은 명배우가 될 수 있어요. 명배우가 되려면 ‘나’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나는 그 무엇도 아니기 때문에 깡패 역할을 맡으면 그냥 깡패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창녀 역할을 맡았다면 그냥 창녀가 되는 거예요. 농부 역할을 맡았다면 그냥 농부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농부 역할을 시키면 어색해합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에요. ‘나’를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인연을 따라 몸을 못 나투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많은 경험을 할수록 훌륭한 연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연기자가 되려면 무아의 상태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주어진 대로 그 역할을 다 해낼 수가 있는 거예요. 물은 모양이 없지만 병에 넣으면 병 모양, 컵에 넣으면 컵 모양, 이렇게 유연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내부에 뭔가를 ‘이것이다’ 하고 움켜쥐고 있습니다. ‘나는 스님이다!’ 하면서 농사를 짓고, ‘나는 스님이다!’ 하면서 청소를 하기 때문에 농사를 짓든 청소를 하든 뭔가 어색한 거예요. 청소를 할 때는 그냥 청소부가 되고, 농사를 지을 때는 그냥 농사꾼이 되면 하나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나는 무엇이다’ 하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우리는 그 무엇도 아닙니다.
‘나는 무엇이다’ 하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대개 한번 유명해지고 나면 인생이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내가 어떤 드라마에 출연해서 유명해진 것은 어제의 일입니다. 오늘의 일이 아니에요. 어제는 학교에 갔으니까 학부형이었지만, 오늘은 가게에 갔으니까 학부형이 아니고 손님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학부형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이런 어리석음을 반복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힘든 겁니다.
젊을 때 너무 일찍 유명해지거나 성공하면 인생이 불행해지는 이유가 늘 과거의 기억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에요. 어릴 때 상처를 입은 사람이 그 상처를 잊지 못하고 늘 과거 속에 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젊을 때 일찍 유명해진 사람이 죽을 때까지 유명세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늘 과거를 그리워하며 살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과거를 그리워하며 사는 사람이 술 먹으면 하는 말이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입니다. 우리는 현재에 살지 못하고 과거에 살 때가 많습니다. 권위주의적인 행동도 다 꿈속에 살기 때문에 나오는 겁니다.
과거의 꿈속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바로 붓다가 말한 ‘무아’입니다. 고정된 실체는 없어요. 약이라는 실체도 없고, 독이라는 실체도 없습니다. 먹고 나으면 약이라고 하고, 먹고 죽으면 독이라고 하는 겁니다. 본래부터 이것은 약이고, 이것은 독이라고 고정된 실체는 없는데, 우리는 이것은 약이라고 하고, 이것은 독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독이라는 것도 조금만 먹으면 약이 되는 경우가 있고, 약이라는 것도 많이 먹으면 독이 되는 경우가 있는 거예요.
선악도 마찬가지입니다. 길 가는 사람을 때리면 폭행이 되지만,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하는 사람이 일본 사람을 때리면 독립운동이 되는 겁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한 것도 한국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독립운동이지만, 일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자기 나라의 국무총리를 죽인 테러 행위입니다. 이렇게 정해진 게 없다는 무아의 본질을 꿰뚫어 알 때 우리는 훨씬 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창의적이라는 것도 결과주의적인 관점입니다. 창의적이라고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창의적인 것도 결국 모방을 바탕으로 해서 나옵니다. 그림을 그리거나 집을 지을 때 남의 것을 똑같이 모방을 하면 전통을 지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모방을 하다가 실수를 해서 조금 다르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당대에는 틀린 것이 됩니다. 하지만 천년쯤 지나면 창의적인 작품이 됩니다. 똑같은 작품도 기준을 전통에 두고 모방을 하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틀린 것이 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창의적인 것이 되는 거예요.
모든 창의성은 틀린 데서 나옵니다. 실패했을 때 창의성이 나옵니다. 그러니 틀리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실패를 해야 창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요즘 창조적인 사람들을 보면 약간 특이한 기질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모자라는 행동을 하지는 마세요.
우등생은 모방의 가치에서 나온 겁니다. 창조적 관점에서는 어떤 것도 우열을 정할 수가 없어요. 오늘날 한국의 학교 교육은 모방 교육입니다. 오늘날 세계인들이 좋아하는 K팝이라고 하는 것도 서양의 클래식 음악을 기준으로 하면 저급한 음악입니다. 한국의 전통 음악을 기준으로 봐도 잘못된 음악입니다. 그러나 서양의 클래식 음악과 한국의 전통 음악이 믹스가 된 것이 많은 대중들의 호응을 받으니까 창조적이 된 겁니다.
창조적이 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자기가 좋은 대로 하면 돼요. 자기가 좋은 대로 했는데 대중이 호응을 하면 창조적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창조적인 것을 만들어도 대중이 호응하지 않으면 창조적이라고 인정받지 못하는 거예요.
지금 평가가 좋은 것도 천년이 지나면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결국 여러분이 추구하는 것은 돈벌이가 되느냐 아닙니까. 돈벌이가 되면 창조적인 것이 되는 것이고, 돈벌이가 안 되면 실패가 되는 거잖아요.
지금 제가 부탄에서 하는 사업은 지금을 기준으로 하면 아무도 호응을 안 하니까 실패로 평가가 되겠죠. 그러나 100년 후에 기후 위기 시대가 와서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게 되면 ‘스님은 100년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이렇게 재평가가 될 겁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조금 더 미래를 내다보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요즘 사람들이 내 작품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100년 정도 지나야 사람들이 내 작품을 이해할 것이다.’
이렇게 자신감을 갖고 살면 안 됩니까? 고흐의 그림도 100년이 지나서 사람들이 이해를 했잖아요.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미술가들도 당시에는 밥조차 제대로 못 먹었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너무 욕심이 많아요. 작품을 만들어서 지금 당장 유명해지고 싶어 해요. 그러려면 모방을 해야 합니다. 창조적이 되려면 10년이든 20년이든 대중의 인기에 연연하지 말아야 해요. 대중이 호응을 해서 갑자기 유명해졌다 하더라도 ‘이건 우연이다’, ‘대중이 뭘 몰랐나 보다’, ‘재수가 좋았나 보다’ 이렇게 받아들여야 마음이 들뜨지 않습니다. 그래야 자신의 삶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늘 대중의 반응에 놀아나는 꼭두각시가 됩니다. 반응이 나쁘면 괴로워서 술 마시고, 반응이 좋으면 신이 나서 술 마시고, 이렇게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런 삶이 노예의 삶이지 어떻게 주인의 삶입니까. 저는 즉문즉설을 내 마음대로 하잖아요. 주위의 평가에 별로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인생을 조금 길게 보고 자신감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특히 예술을 하는 사람이 너무 당대에 평가를 받으려고 하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려면 의사가 되거나 변호사가 되거나 사업가가 되어야죠. 예술을 하면서 자꾸 당대의 평가를 받겠다고 하는 것은 조금 안 맞지 않을까요? 그리고 대중이 원하는 것들이 워낙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평가를 받아봐야 그날뿐이고 자고 일어나면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런 평가는 일회성이지 진지하게 예술을 생각해서 나온 평가는 아니거든요.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2024.04.04. 법륜스님의 '하루' 중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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