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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스님의 하루

사실을 사실대로 알게 되어도 괴롭습니다, 왜 그럴까요?

by 명랑bb 2024. 5. 23.

 

사실을 사실대로 알면 괴로울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을 알게 되어도 괴로운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아이가 있어서 그런지 뉴스에서 특히 아동 학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참 괴롭고 슬픕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알면 괴로울 일이 없다고 하셨는데, 막상 저는 사실을 접하고 나면 괴로움이 생겨서 제가 불교대학 수업 때 이해한 내용과 다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길을 가다가 간판이 머리 위로 떨어져서 다치는 일이 생기면, 우리는 대부분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이 길에서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은데 왜 하필 나만 다쳤냐’, ‘오늘 나는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간판이 내 위로 떨어지고 중상을 입게 되었느냐’ 이렇게 생각합니다. 간판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진 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이유를 찾으려다 보니 옛날 사람들은 전생에 죄를 지어서 그렇다고 이해를 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공사장에서 벽돌이 떨어지는 바람에 벽돌에 맞았다고 해봅시다. 그냥 사고로 일어난 일인데도 옛날 사람들은 ‘네가 전생에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라고 하거나 ‘오늘 벽돌을 놓친 사람을 전생에 네가 돌로 때려 다치게 했기 때문에 오늘 너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다’ 하고 설명합니다. 이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 이유로 사고가 났을까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것을 인연과보(因緣果報)의 관점에서 보면, 마침 돌이 떨어지는 위치와 시간, 그리고 사람이 지나가는 위치와 시간이 맞아 떨어져서 생겨난 일입니다. 마침 돌이 떨어지는 시점에 그 위치를 지나가게 되어서 발생한 일이지, 어떤 죗값에 의해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일단 사고가 발생했으니 우선 치료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를 해야 합니다. 공사를 할 때는 반드시 바깥에 포장을 쳐서 물건이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안전장치를 하면 앞으로는 이런 일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안전장치를 통해 사고가 생길 수 있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반면 이 일을 인과응보의 관점에서 보면, 다치는 사람들은 모두 무슨 죄를 지어서 그 죗값을 받는 것이 되기 때문에 상황을 개선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모두 자기가 지은 죗값을 받는 것이니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말겠죠. 현재 팔레스타인에서 폭격을 받아서 죽어가는 아이들도 모두 하느님한테 죄를 지은 전생의 죗값을 받는 것이라고 이해해 버리면 상황을 개선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어떤 일이 왜 발생했는지 그 인연을 알고, 앞으로 재발하지 않기 위한 대책을 세우는 게 중요합니다. 그걸 보고 괴로워하는 건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괴로워하면 우선 자기가 괴로워서 손해이고,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되니까 세상에도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인연과보를 알아서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갈 때, 우선 나도 괴롭지 않고, 나아가 세상에도 이로운 일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사실을 탁 직시하면, 우선 내가 현명한 선택을 했기 때문에 내가 괴로워할 일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길거리를 가다가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다고 해서 그것이 괴로워할 일은 아니잖아요. 마찬가지로 이것도 하나의 사고입니다. 전생의 죄로 인해 생긴 일도 아니고, 나의 잘못도 아니고, 이 일로 인해 내 몸이 더러워진 것도 아니고, 마치 사고로 다리가 부러지듯이 나에게 사고가 생긴 거예요. 몸에 난 상처는 치료하면 됩니다. 길에서 사고가 났으면 길을 평평하게 만들거나 걸림돌을 없애서 사고가 재발하는 걸 방지해야 하는 것처럼, 나쁜 사람으로 인해 발생한 일이니까 이건 신고를 통해 그 사람이 처벌받도록 해서 이 사고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고에 대한 예방이나 재발 방지를 하는 자세가 부족합니다. 그걸 두고 싸우기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재작년 10월 29일에 이태원에서 큰 사고가 있었습니다. 인명 피해가 컸던 만큼 왜 사고가 일어났는지 조사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그런 사고가 안 나게 하려면 안전장치를 취해야 합니다. 이처럼 철저히 조사를 하고 재발 방지를 하면 될 일이지, 이걸 갖고 싸울 일이 뭐가 있습니까?

 

만약 조사를 했는데 우연히 일어난 사고일 때는 누구에게 책임을 물으면 안 됩니다. 반면, 누군가가 안전장치를 하라고 했는데도 이행하지 않은 쪽이 있다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가령, 담벼락을 세우지 말라고 한 위치에 담벼락을 세웠다거나, 이런 행사가 있으면 안전장치를 하라고 법에 정해져 있는데 경찰이 법 집행을 안 했다거나, 구청이 할 일을 다하지 않았다거나, 주최 측이 할 일을 다하지 않았다면 그에 맞는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조사를 해 보니까 경찰은 맡은 임무를 다했고, 구청도 맡은 임무를 다했다면, 무엇이 부족했는지 찾아서 대책 마련을 하면 됩니다.

 

이런 사태가 왜 일어났는지 알기 위해서도 조사를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책임질 사람이 있으면 책임을 져야 하고, 무엇보다 재발 방지를 위해서 조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걸 조사도 안 하겠다고 하면 문제입니다. 조사를 하지 않으면 재발 방지를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똑같은 일이 되풀이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경우든 괴로워할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외면하거나 내팽개치라는 것도 아니고, ‘이미 일어난 일을 어떡하냐’ 하며 그냥 받아들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우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안전 교육을 해야 하고, 필요한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 버린 일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고, 조사를 해서 재발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고, 재발의 위험을 낮출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우리가 인생을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2024.05.21 법륜스님의 '하루'에서 발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