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인으로서 불교의 역사를 공부해 보니까 승속이 분리되었다가 다시 통합이 되는 모습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60년 전에 히피들은 인도에서 서양으로 불교를 가져올 때 알아차림과 명상만 가져오고 나머지는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했던 명상에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길을 잃었습니다. 알아차림의 방식을 취하긴 했지만 붓다 담마는 아니었기 때문에 명상을 하고 나서 ‘그다음은 뭐지?’ 하고 깊은 우울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심리학적 또는 인지적인 상담을 통해서 마음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를 찾아가기도 하는 등 불교가 현대인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다양한 방식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저도 굉장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변화의 분위기 속에서 제가 고향인 영국으로 돌아가서 할 수 있는 만큼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도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좀 어렵게 느껴집니다. 이에 대해 스님의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도 그렇고, 불교도 그렇고, 큰 혼란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혼란기를 나쁘게만 볼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에는 매우 좋은 시기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안정된 시대에는 기존의 권위에 억눌려서 새로운 것이 일어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혼란기는 사람들이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혼란이 있는 반면에 누구나 다 그렇게 해야 되는 줄 알았던 것이 무너져 버림으로 인해 새로운 길을 한 번 찾아가 볼 수 있는 자유로움이 생깁니다.
바로 붓다가 태어난 시기에도 브라만의 전통적인 권위가 무너지고 사문들의 새로운 문제 제기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렇다고 사문들 역시 뚜렷한 대안이 되지 못했고, 그래서 세상이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습니다. 바로 그때 붓다가 출현했던 거예요. 붓다가 살았던 시대에도 사문들의 많은 주장들이 생겨났듯이 지금 시대에도 많은 주장들이 생겨나고 있는 겁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무조건 비판적으로 보거나 또는 무조건 옳다고 보지 말아야 합니다. 붓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을 무조건 옳다든지 무조건 나쁘다든지 하지 말고, 그들의 주장을 귀담아 들어 보고 진리에 합당하면 수용하고, 합당하지 않으면 버려라.’ 이런 이유로 INEB(참여불교국제네트워크)가 필요한 것입니다. 환경 위기의 시대, 대립과 갈등이 있는 시대, 물질문명의 한계가 온 시대에 인류가 안고 있는 과제들을 극복해 나가려면, 각 나라에서 또는 각 종파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시도를 모두 수용하면서 동시에 인류 문명이 가야 할 새로운 길을 찾아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불교의 경험만이 아니고 과학적인 것, 역사적인 것, 사회적인 것을 포함해서 인류가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모든 성과들을 다 수용해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합니다.
붓다가 당시에 존재했던 모든 학문과 사상을 기초로 해서 새로운 길을 찾았듯이 우리도 붓다와 같은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저는 불교의 연기 사상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토회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관점을 갖고 시작했습니다. 테라밧다, 마하야나, 바즈라야나, 젠 등 나중에 나온 이런 역사적인 산물이 아니라 처음에 붓다가 가르친 그 말씀과 행위에 초점을 맞춰서 새로운 길을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럴 때 수행을 중심에 둘 것인지, 사회 실천을 중심에 둘 것인지, 이런 논쟁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둘 다 우리의 삶입니다. 내 마음도 좋아져야 되고, 내가 사는 세상도 좋아져야 되기 때문에 따로 분리하여 대응해서는 안 됩니다. 미국에 확산이 된 불교의 예를 든다면, 1960년에서 1980년대까지는 일본의 선불교가 유행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달라이 라마에 의해서 티벳 불교가 30년간 유행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불교는 비록 숫자는 작지만 가장 성장하는 종교였어요. 그러나 최근에는 다시 정체가 되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에 확산되고 있는 불교는 크게 두 가지로 성격이 나뉘는데, 하나는 주로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는 명상을 중심으로 한 불교입니다. 현재 광범위하게 확산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회실천 운동으로서 환경 운동, 소수자 운동 등 사회변혁 운동에 굉장히 적극적인 불교입니다. 이들은 사회 전체로 보면 극단적 좌파라고 불릴 만큼 행동이 적극적입니다. 그러나 명상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인 실천 활동이 거의 없고,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붓다 담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두 가지 흐름에 대한 제3의 대안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그래서 저는 질문자가 태국에서 불교를 배우는 것은 좋은데, 활동은 태국에서가 아니라 영국으로 가서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현재 세상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려면 미국이 변하거나 영국이 변하는 게 태국이 변하는 것보다 더 큰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 경우에는 미국에 영향을 주고 싶어도 언어가 안 통하기 때문에 영향을 줄 수가 없습니다. 또 영어만 할 줄 안다고 해서 전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은 굉장히 미세한 것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눈빛이라든지 목청의 떨림 같은 것을 보고 아주 디테일한 것까지 파악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외국인과 얘기할 때는 그냥 큰 틀에서만 얘기가 될 뿐이지 직지인심이라고 하듯이 마음을 꿰뚫어 보고 대화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의 경우에는 어떤 얘기를 해도 입에서 나오는 말만 듣는 게 아니라 그의 마음 상태가 어떤지를 바로 직시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즉문즉설이 가능한 겁니다. 더 나아가 그 사람의 인생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도 가능한 거예요. 여러분들도 큰 틀의 원칙은 어디에서든 배울 수 있지만, 한 명 한 명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할 때는 가능하면 자기가 자란 모국어를 쓰는 나라에서 전법을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에는 정해진 것이 없어요. 마치 거울 앞에 무언가 나타나면 그 모습 그대로 비치듯이, 붓다가 무슨 말을 해서가 아니라 상대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붓다의 거울에 그들의 고뇌에 대한 해결책이 그냥 비치는 것입니다. 거울은 헤아릴 수 없는 그림을 비출 수 있지만 거울은 한 그림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그것처럼 붓다는 수많은 설법을 하고도 ‘나는 한 마디 설법도 한 적이 없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대승불교의 경전인 금강경에서는 ‘무유정법’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중도’의 다른 표현입니다.
<2024.06.06 법륜스님의 '하루' 중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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