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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 용어

중도(中道)

by 명랑bb 2024. 5. 4.

 

 

중도(中道)란

 

양극단을 떠난 올바른 길로서 어느 한 극단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 중도의 개념은 초기 불교 이래 불교전통에서 중요시되어 온 개념입니다. 초기 불교에서는 실천론적인 관점에서 주로 논해져 왔으나, 이후에는 철학적 관점에서 논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혼용하여 사용하는 중도(中道)와 중용(中庸)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대립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상대적인 대립이고, 다른 하나는 모순의 대립입니다. '많다', '적다'와 같은 상대적인 대립은 그 중간이 있기에 그 중간이 적당하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선택하는 것을 중용(中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있다', '없다'와 같이 그 중간 사이가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있지도 않으면서 없지도 않는 적당한 지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모순적인 명제들 사이에서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는 상태를 일러 중도(中道)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극단적인 '옳다', '그르다'는 단지 사견일 뿐이라는 것을 깨우쳐서 흘러가다보면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중도(中道)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불교란 무엇인가(이중표)>

 

법륜스님의 중도

 

언제 우리의 기분이 좋아지는지 관찰해 보면, 주로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 기분이 좋아지고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기분이 나빠집니다. 즉, 욕구가 충족이 될 때 기분이 좋고, 불충족될 때는 기분이 나쁩니다. 이것을 ‘즐거움과 괴로움’이라고 말합니다. 쾌락주의는 즐거움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욕망이라는 것을 관찰해 보면, 욕구가 충족되어 만족감을 느끼면 욕망이 거기서 멈추거나 사라지지 않고 더 큰 욕망이 생깁니다. 욕망이 충족되어서 생긴 만족감은 그것이 반복될수록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만족감이 점점 감소합니다.

 

예를 들어, 누가 나한테 백만 원을 주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한 달 후에 그 사람이 또 백만 원을 줍니다. 또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회수가 반복되면 그 즐거움이 점점 줄어듭니다. 그러다 일 년이 지속되면 백만 원을 받아도 기분이 처음만큼 좋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직도 백만 원인가?’ 하는 불편한 감정이 일어납니다.

 

욕망을 쫓는 쾌락주의로는 윤회의 세계를 벗어날 수가 없으니까 그에 반하는 고행주의가 나온 겁니다. 붓다도 깨닫기 전에 몇 년 동안 고행주의를 따르는 스승을 찾아가 많은 수련을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붓다의 6년 고행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가까운 다섯 친구들도 놀라워할 정도로 고행을 했는데도 결국 붓다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이 가장 편안했던 때가 언제였는지 돌이켜보았습니다. 가장 편안했던 때는 어릴 때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것을 보고 ‘왜 하나가 살기 위해서 다른 하나는 죽어야 할까?’ 하고 염부수 아래에서 고요히 명상을 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의 수행 방법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했습니다.

 

출가하기 전에는 욕망을 따랐고, 출가한 후에는 욕망을 억압했습니다. 이 두 가지 방법은 정반대입니다. 그러나 욕망에 대해서 반응을 한다는 측면에서는 똑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나를 잡아당긴다고 합시다. 잡아당기는 대로 끌려가거나, 안 끌려가기 위해 반대로 힘을 써서 저항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두 가지 방법은 정반대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당기는 것에 반응을 한다는 면에서는 같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욕망에 반응하지 않는 길을 찾은 것입니다. 욕망에 끌려가지도 않고, 욕망에 저항하지도 않고, 욕망을 욕망인 줄 다만 알아차릴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붓다가 발견한 새로운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도입니다.

 

중도란 양쪽의 중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양쪽을 뛰어넘은 한 단계 더 높은 길입니다. 붓다는 이 길을 발견하고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욕망에 끌려가지도 않고, 욕망에 저항하면서 긴장하지도 않습니다. 욕망에 끌려가지 않으니까 밖에서 볼 때 그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도 욕망에 저항을 하지 않으니까 스트레스도 없습니다. 욕망을 따르지도 않으면서 또한 긴장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다만 욕망이 일어날 때 욕망인 줄 알 뿐이었습니다.

 

인도 사람들이 말하는 ‘윤회’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지만, 붓다가 말하는 ‘윤회’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되풀이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도의 전통적인 사상에서 해탈과 열반은 태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붓다의 열반은 괴로움과 즐거움이 되풀이되지 않는 것, 즉 괴로움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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